오늘 정독의 본문인 창세기 25~27장을 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창 25:21) 이삭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드리니, 여호와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리브가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 25:22)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기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리브가는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며 여호와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나라가 네 몸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리브가가 임신을 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관한 뜻을 정하신 바가 있었다. 

 

이게 예정론의 문제로 가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정해두셨는데, 사람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며 복음을 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해두셨으니까!) 라는 요상한 문제로 풀어질 수 있어서 다소 조심스러우나 그냥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신앙생활을 해온 약 25여년의 시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십차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아주 소중한 진리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바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시며 전지전능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역사는 History = His(God's) Story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말까지 모든 것을 정해두셨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결코 숨기지 않고 성경에 모두 기록해두셨다. 그 성경을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 열리지 않고 풀리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 의지하여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바라보고 성령님께 깨달음을 구하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진실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만한 자들에게는 찾을 수 있도록 다 기록해두셨고 가르쳐주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두 아이를 향하신 뜻을 정해두셨다. 왜 그래야 하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실 권한이 있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인본주의적인 교육을 오래 받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반발심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해두셨고 그것에 따라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마치 자신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 같고 나의 의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그 계획대로 이루신다는 것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대전제가 없이는, 사람이 지금까지 배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 사람의 눈에 고통이고, 고난이고,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인 경우가 많으나 어쨌든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해,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도 조금이나마 더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던 두 아이, 에서와 야곱에 관한 뜻을 가지고 있으셨다. 이것은 로마서 말씀에도 설명이 되어있다. 

 

(롬 9:10)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롬 9: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는 목적을 굳게 세우기 위해,
(롬 9:12) 리브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불러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롬 9:13) 이것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롬 9: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정하지 못하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롬 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자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9:16) 그러므로 모든 것이 사람의 요구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는 목적을 굳게 세우기 위해 에서와 야곱을 향해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다. 

 

(롬 9:17)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것은 너를 통해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두루 전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롬 9: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만드십니다.
(롬 9:19) 그러면 여러분 중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롬 9: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한단 말입니까? 토기그릇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롬 9:21) 토기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똑같은 진흙으로 귀하게 사용할 그릇과 천하게 사용할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단 말입니까?
(롬 9:22)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시고 그분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셨으면서도 멸망받기로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인내로써 참아 주셨다면 어쩌겠습니까?
(롬 9:23)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영광에 들어가도록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어쩌겠습니까?


결국 지극히 선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토기장이가 필요에 따라 그릇을 만들듯이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실 권한이 있다. 다만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서는 내가 어떤 그릇인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다 알 수가 없기에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바대로 순종의 그릇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도 순종의 그릇으로 (아마) 예정되어 있는 것을 이 땅에서 증명할 수 있을 것이요, 반대로 성경이 주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로마서 1장 말씀처럼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두셨음에도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은 그 자체로(그 선택 자체가) 어찌보면 결국에는 구원받지 못할 자였다는 것을 스스로가 증명하는 셈이 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역시 오늘날 우리는 후대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셨구나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들의 삶의 순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내내 나오지만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시고 알려주지 않으려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들,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해주셨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오늘 본문에 리브가에게도 하나님은 다 말씀해주셨다. (오늘날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 말씀해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늘 자기 옳은 소견대로,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다 말씀해주셨다. 

 

만약 리브가가 하나님께 그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 두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묻고 구했다면 결과는 동일했었을지라도 과정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에서와 야곱 역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을 사람의 관점에서 '이게 무슨 차별이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의 뜻보다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쭤보고 하나하나 순종하면서 나아갔다면 에서도, 야곱도 인생을 그렇게 고달프게 살 필요가 없지는 않았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리브가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적용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에서의 잘못은 맏아들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창25:34), 야곱의 잘못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꾀와 속임수로 일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랬기 때문에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자신이 죽기까지 야곱을 다시 보지 못했으며(스스로 그 저주를 받겠노라 하였음 - 창27:13), 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야곱을 미워하는 증오심 속에 괴로운 삶을 살았고, 야곱은 에서보다 더한 외삼촌 라반을 만나 엄청난 연단의 시간을 거치고 에서를 두려워 하는 마음 속에서 항상 살아야만 했다. 물론 이삭도 눈이 어두워지고 사리분별이 흐려지면서 에서와 야곱을 분간하지 못한 실수 가운데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선포하고 에서에게는 줄 복이 없게 만든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실수 또한 크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된 것이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은 있으시겠으나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택과 순종의 자리를 허용하시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까지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 인해 얼마나 인생이 꼬일 수 있는지(하나님의 역사는 그 뜻대로 흘러가지만) 여실하게 보여주시며 후대에게 교훈을 삼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통로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오늘날 참으로 세상이 혼란스럽고 더욱 악으로 치닫는 것 같아 마음을 어려울 때가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 앞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왜 이런 것을 내버려두시느냐 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더더더 악이 관영해질 것이라고 하셨으며 이 세상은 결국 멸망으로 갈 것이라고 이미 성경에 기록하시고 다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이미 예비해두셨고 이 땅은 그 악이 가득해질 때 결국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미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심판받게 될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골 3: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골 3:2)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골 3:3) 옛 사람은 죽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골 3:4) 여러분 모두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골 3:5)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죄악된 것은 다 버리십시오. 성적인 죄, 악한 행동, 나쁜 생각, 지나친 욕심 등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골 3:6)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골 3:7) 여러분이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했을지 모릅니다.
(골 3:8)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몰아 내려고 힘쓰십시오. 분한 생각, 화를 내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 선하지 못한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골 3:9)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골 3:10)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뜻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보고 안다고 하면서도 정말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시는 방식을 믿지 않고 나의 옳은 소견 가운데 죄로 나아갔던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미 나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나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나는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뜻과 계획을 따라 순종의 그릇으로, 의의 도구로 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삶에 대해 내 생각을 따라 짐지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자리에 기꺼이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6) 성적인 죄를 범하지 말며, 에서처럼 하나님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하십시오. 에서는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었지만, 한 그릇의 먹을 것을 위하여 맏아들의 특권을 팔고 말았습니다.
(히 12:17) 여러분도 알다시피 에서는 그후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울면서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으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멘! 내 안에 자꾸만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곧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장자의 명분을 파는 죄악이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정신차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은 창세기 22~24장이었는데 성령님께서 각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에 대해 주목해서 보게 하셨다. '여호와 이레'의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한 본문이라 내 생각이 마구 마구 솟아올랐다.

그렇지,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단한 믿음을 가졌지

자기 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다니 정말 엄청난 순종이야

역시 믿음의 아버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할 수 있어야지

이런 믿음을 드려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데, 아 나는 뭐지?

이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아가려는 순간!

아차! 묵상은 이렇게 하는게 아니지, 내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성경을 풀어달라고 구해야 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성령님이 멈추게 해주셨다, 감사합니다!) 

다시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잠잠히 구했다. 

 

그랬더니 나의 온갖 잡생각이 사라지고, 갑자기 나의 시선이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동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시선! 그 마음이 나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 22:1) 이 일들이 있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22장의 시작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맞닥뜨릴 때,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거 보시니 퍽이나 좋으십니까?"라고 하늘에다 삿대질을 하는 듯한 마음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절대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의 인생에 무엇인가를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시작부터 나의 죄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찾고 구할 기회를 주시고, 그 영혼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붙든다면 그의 인생이 새로 태어나게 도와주시는 좋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그를 부르신 것 자체가 아무 뜻 없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조물주가 장난치듯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새겨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볼 때, 온 땅을 두루 감찰하다가 자신을 향하여 귀기울이고 있는 영혼을 부를 때 그가 즉각 답을 한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얼마나 기쁠까? 그(아브라함)가 나(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마음이 열려있고, 또한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내가 창조한 피조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실 것 같다.(이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태도를 볼 때에도 계속 연결되는 마음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네 아들을 잡아,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쳐라.”
(창 22: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한 다음에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실로 엄청난 말씀을 하셨다. 그가 100세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통로인 그 아들을 태워 드리는 제물로 바치라니!!! 그런데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이룰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하고 번제물이 될 아들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브라함은 흔하디 흔한 사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삭을 바치라니요? 이삭이 어떤 아들인지 하나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럴리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많은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이미 약속하셨는데요? 제가 잘못 들은거겠지요

말도 안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죽입니까? 하나님, 그렇게 잔인한 분이셨나요?

등등등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법한 소리를,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이럴까? 저럴까? 설마 그럴까? 사람의 생각으로 왔다 갔다 분분하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도 않고 즉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는 아브라함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 그래! 잘 한다! 바로 그거다!
이제 앞으로는 쭉 내가 말한대로만 해라. 그 길로 너는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통과해내기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창 22:4) 삼 일째 되는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멀리에 그 곳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모리아 땅으로 가기까지는 무려 3일이나 걸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즉각 길을 떠났지만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가야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도중에서 포기하는가?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과정 중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그 곳에 도착해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는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과정이 결론은 아닌 것이다. 결론은 거기까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우리의 목표가 본향인 천국인 것처럼!!!)

 

3일이나 걸린다 하더라도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아브라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길을 떠난 아브라함이었기에,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할 수 있도록,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으셨을까?

 

내 아들아, 내 딸아, 잘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이제 다 와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라.
이 길의 끝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자녀들아.

 

이렇게 외치며 우리를 안아주시려고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창 22:5) 아브라함이 자기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나귀와 함께 이 곳에 머물러 있어라. 내 아들과 나는 저쪽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겠다.”
(창 22:6) 아브라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에 쓸 장작을 자기 아들에게 지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챙긴 후, 아들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창 22:7)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
(창 22:8) “얘야,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칠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은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성경을 보면 이 장면이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든 장면일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설교들이 이 당시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상상해서 '매우 인간적인 고뇌'가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었을 것 같이 묘사한다. 그러나 이 장면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가는 이 길에서 고통스러워 하거나 괴로워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삭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는 전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에게 지게 했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후에 부지런히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삭이 보기에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이 보이지 않아 천진난만하게  그 양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참으로 지혜롭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가리운 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칠 양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계속 묵묵히 아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갔다. 

 

이것에 대해 당시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는데도 아들을 바칠 준비를 한 것입니다.
(히 11:18)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네게 약속한 후손은 이삭을 통해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 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으나 거기에서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고자 불과 칼을 챙겨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에게 약속한 후손이 이삭을 통해 나올 것'이라고 하셨는데도 이삭을 죽이라 하시는 것은 "아!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구나!"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그가 실제로 본 적도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능히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데리고 갔을 때, 그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 네가 나를 알아주는구나!
네가 나의 선한 뜻을 아는구나.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어 내가 몹시 기쁘다.
나의 능력을 알아주니 내가 너의 믿음대로 다 보여주고 싶구나!
 

 

하나님의 진심을 알아주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알아주고,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드린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매우 기쁘시지 않을까? 

 

(창 22:9)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 놓은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창 22:10) 그리고 나서 칼을 들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창 22:11)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러자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창 22:12)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마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나무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자기 아들 대신에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창 22:14) 이 일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당도했다. 그는 그 곳에서도 지체하지 않고 그 곳에 온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기껏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목적지까지 다 와서 자신의 의를 드러낸다거나 다른 엉뚱한데로 새지 않고 그는 원래 그 목적지까지 온 이유를 확실하게 하며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불러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그를 말렸다. 그러면서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을 때 나무에 뿔이 걸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보았고, 그는 비로소 '이 숫양을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숫양을 잡아다가 자기 아들 이삭 대신에 번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 =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창 22:15) 여호와의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창 22:16) 천사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바치려 했으므로, 맹세코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겠노라.
(창 22:17) 내가 분명히 너에게 복을 주고 또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며, 네 자손은 원수의 성들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창 22: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므로, 네 자손을 통해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는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려 했기에,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새겨주셨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하나님 편에서 이미 하셨던 약속에 대한 보증에 보증을 거쳐 주신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진정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증해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여정을 통해 아들 이삭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순종을 드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실로 체험했다. 즉, 내가 죽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만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었으리라! 아직 그의 눈 앞에는 당도하지 않은 후손대의 일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을 때 숫양을 준비해두신 것처럼 앞으로의 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인도하시며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브라함 안에 더욱 확고해졌을 것 같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래, 자랑스럽다 나의 아들아! 내가 이 상을 주기 위해 너를 이 곳으로 불렀노라. 
네가 순종하여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못 받았을 이 상이,
이제 진실로 가야 할 자리를 찾아갔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온 땅을 두루 살피며 나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너를,
내가 창조한 것이 진실로 기쁘다. 
내가 마련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도록 하여라.
너의 누림이 곧 나의 기쁨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시험을 멋지게 통과해냈을 때 하나님은, 자기가 한 것보다 자녀가 한 것을 더욱 기뻐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마 25:31) “인자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마 25:32) 그 때에 세상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모일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인자가 사람들을 나눌 것이다.
(마 25:33) 인자는 자신의 오른쪽에는 양을, 왼쪽에는 염소를 둘 것이다.
(마 25:34) 그 때 왕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은 너희들이여, 와서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아라.
(마 25:35) 내가 배가 고플 때, 너희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마를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초대해 주었다.
(마 25:36)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는 내게 옷을 입혀 주었다. 내가 아플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당신께서 주실만한 복을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이 되어주기를, 그래서 마음껏 붓고 붓고 또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요10:10)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피조물인 사람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고,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기를 원하시는, 정말로 좋고도 선하신 것이다. 

 


 

(약 1:12) 시험을 받은 후, 더 강건해졌다면 복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멘아멘!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은 나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에서 나의 믿음을 증명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에게 상을 주시려고 모든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니 지금 내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에서 상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시는 좋으신 분임을 알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임을, 선하신 분임을 알고 믿는다 하면서도 순간 순간 인생에 닥친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고 요동했던 모든 불신앙의 순간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주님께서 나에게 순종하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 그것을 진실로 순종하는 행함으로 나아갈 때 상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롯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에 비하면 짧게 서술되어 있다. 오늘은 성령님께서 롯에 대해 집중케 하심이 있어서 롯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려주셨다. 

(창 18: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8)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8:19)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소돔과 고모라 백성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나 악하다.
(창 18: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셨다. 


(창 18:22) 그리하여 세 사람은 그 곳을 떠나 소돔 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창 18:23) 아브라함이 주께 다가가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착한 사람들도 저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창 18:24) 만약 저 성 안에 착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저 성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저 안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 오십 명을 위해 저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창 18:25) 제발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니 옳은 판단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천사가 소돔 쪽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서 하나님께 그 성에 의인이 있는데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실 것이냐고 물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주여, 노하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해 주십시오. 만약 열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열 명만 있어도, 저 성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게 된다 ㅠㅠ)

 

창세기 19장에서 두 천사가 소돔을 살피러 갔다가 그들의 악함에,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결정하셨다는 것을 롯에게 알려준다. 

 

(창 19:13) 우리는 이 성을 멸망시킬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이 성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에 대해 모두 들으셨소.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오.”

(창 19:15) 이튿날 새벽이 되자, 천사들이 롯에게 빨리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둘러 여기 있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나가시오. 죄악으로 인해 이 성에 심판이 임할 때에 당신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창 19:16) 그래도 롯이 머뭇거리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창 19:17) 두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살려면 이 곳을 피해야 하오.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마시오. 산으로 도망가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죽을 것이오.”

 

하나님의 천사들은 롯에게 임박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롯은 그 당시에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기까지 해주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성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 천사는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말라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를 해주었다. 

 

(창 19:18) 그러자 롯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제발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창 19:19) 주께서는 주의 종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산까지 달려갈 수 없습니다.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저도 죽을까 두렵습니다.
(창 19:20)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저 성은 도망가기에 가깝고도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저 성으로 도망가게 해 주십시오. 저 성은 참으로 작지 않습니까? 저 성으로 도망가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창 19:21) 천사가 롯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일에도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당신이 말한 저 성은 멸망시키지 않겠소.
(창 19:22) 하지만 빨리 도망가시오. 당신이 저 성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소돔을 멸망시킬 수 없소.” 그러므로 그 때부터 그 성은 ‘작다’는 뜻으로 소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신을 살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감사함으로 소돔을 기꺼이 떠나 산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죽을까봐 두렵다"라고 하며 본인이 생각했던 적당한 거리의 소알 성으로 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천사는 그런 그의 그 부탁까지도 들어주었고,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창 19:29) 하나님께서 골짜기의 성들을 멸망시키셨지만 아브라함의 부탁을 기억하셔서, 롯이 살던 성을 멸망시키실 때에 롯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중보) 덕분에, 정말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소돔을 떠날 것을 머뭇거렸으며, 소돔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가 보기에 적당한 소알 성에서 머무르기를 원하였다. 

(창 19:30) <롯과 그의 딸들> 롯은 소알에서 계속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두 딸은 산으로 이사했습니다. 롯은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롯은 소알에 살면서도 계속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산으로 이사했고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그리고 결국 그 동굴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악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딸들이 "세상 사람들이 다 결혼하는데 우리와 결혼할 남자가 없으니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하여 잠자리를 갖고 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갖자"라는 몹쓸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다. 

 

롯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이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구경꾼마냥 자기의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4장에서 롯이 소돔에 살다가 왕들의 전쟁 가운데 붙잡혀 갔을 때도 아브라함이 구출해주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소돔에서 도망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롯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브라함의 도움은 받았으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롯이 계속해서 구원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적당한 곳에서 타협하고, 소돔이 멸망한 것을 보고서도 자신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보다 계속해서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가면서 계속해서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다는 것을 볼 때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이 떠오른다. 

 

(요일 4:1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요일 4:18)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롯과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아 알면서도, 계속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머무르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롯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는 것이기에, 나의 최종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줄 수도 있고, 내가 또한 중보기도의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만 유효하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결국 내가 행한 것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임을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새겨야겠다.  

(전 12:14)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와 남몰래 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히 9:27) 사람들은 모두 한 번은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내 안에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임을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롯과 같이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내 안에서 소멸되도록 더욱 진리의 빛을 밝혀주사 진리를 알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고 죄에서 떠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더 이상 롯과 같이 세상에서 머뭇거리며 세상의 어떠함을 괴로워하고 두려워 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선포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서 요동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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