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롯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에 비하면 짧게 서술되어 있다. 오늘은 성령님께서 롯에 대해 집중케 하심이 있어서 롯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려주셨다. 

(창 18: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8)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8:19)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소돔과 고모라 백성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나 악하다.
(창 18: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셨다. 


(창 18:22) 그리하여 세 사람은 그 곳을 떠나 소돔 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창 18:23) 아브라함이 주께 다가가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착한 사람들도 저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창 18:24) 만약 저 성 안에 착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저 성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저 안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 오십 명을 위해 저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창 18:25) 제발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니 옳은 판단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천사가 소돔 쪽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서 하나님께 그 성에 의인이 있는데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실 것이냐고 물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주여, 노하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해 주십시오. 만약 열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열 명만 있어도, 저 성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게 된다 ㅠㅠ)

 

창세기 19장에서 두 천사가 소돔을 살피러 갔다가 그들의 악함에,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결정하셨다는 것을 롯에게 알려준다. 

 

(창 19:13) 우리는 이 성을 멸망시킬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이 성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에 대해 모두 들으셨소.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오.”

(창 19:15) 이튿날 새벽이 되자, 천사들이 롯에게 빨리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둘러 여기 있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나가시오. 죄악으로 인해 이 성에 심판이 임할 때에 당신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창 19:16) 그래도 롯이 머뭇거리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창 19:17) 두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살려면 이 곳을 피해야 하오.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마시오. 산으로 도망가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죽을 것이오.”

 

하나님의 천사들은 롯에게 임박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롯은 그 당시에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기까지 해주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성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 천사는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말라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를 해주었다. 

 

(창 19:18) 그러자 롯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제발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창 19:19) 주께서는 주의 종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산까지 달려갈 수 없습니다.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저도 죽을까 두렵습니다.
(창 19:20)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저 성은 도망가기에 가깝고도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저 성으로 도망가게 해 주십시오. 저 성은 참으로 작지 않습니까? 저 성으로 도망가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창 19:21) 천사가 롯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일에도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당신이 말한 저 성은 멸망시키지 않겠소.
(창 19:22) 하지만 빨리 도망가시오. 당신이 저 성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소돔을 멸망시킬 수 없소.” 그러므로 그 때부터 그 성은 ‘작다’는 뜻으로 소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신을 살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감사함으로 소돔을 기꺼이 떠나 산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죽을까봐 두렵다"라고 하며 본인이 생각했던 적당한 거리의 소알 성으로 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천사는 그런 그의 그 부탁까지도 들어주었고,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창 19:29) 하나님께서 골짜기의 성들을 멸망시키셨지만 아브라함의 부탁을 기억하셔서, 롯이 살던 성을 멸망시키실 때에 롯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중보) 덕분에, 정말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소돔을 떠날 것을 머뭇거렸으며, 소돔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가 보기에 적당한 소알 성에서 머무르기를 원하였다. 

(창 19:30) <롯과 그의 딸들> 롯은 소알에서 계속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두 딸은 산으로 이사했습니다. 롯은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롯은 소알에 살면서도 계속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산으로 이사했고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그리고 결국 그 동굴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악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딸들이 "세상 사람들이 다 결혼하는데 우리와 결혼할 남자가 없으니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하여 잠자리를 갖고 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갖자"라는 몹쓸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다. 

 

롯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이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구경꾼마냥 자기의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4장에서 롯이 소돔에 살다가 왕들의 전쟁 가운데 붙잡혀 갔을 때도 아브라함이 구출해주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소돔에서 도망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롯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브라함의 도움은 받았으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롯이 계속해서 구원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적당한 곳에서 타협하고, 소돔이 멸망한 것을 보고서도 자신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보다 계속해서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가면서 계속해서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다는 것을 볼 때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이 떠오른다. 

 

(요일 4:1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요일 4:18)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롯과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아 알면서도, 계속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머무르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롯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는 것이기에, 나의 최종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줄 수도 있고, 내가 또한 중보기도의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만 유효하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결국 내가 행한 것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임을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새겨야겠다.  

(전 12:14)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와 남몰래 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히 9:27) 사람들은 모두 한 번은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내 안에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임을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롯과 같이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내 안에서 소멸되도록 더욱 진리의 빛을 밝혀주사 진리를 알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고 죄에서 떠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더 이상 롯과 같이 세상에서 머뭇거리며 세상의 어떠함을 괴로워하고 두려워 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선포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서 요동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5~17장까지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람의 생각과 말 VS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알 수 있다. 

(창 15:1)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다> 이 일들이 있은 후에 여호와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이다.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창 15:2)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마스커스 사람인 제 종 엘리에셀이 제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창 15:3) 아브람이 또 말했습니다. “주께서 저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태어난 종이 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지키시며 그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 말씀하시는데,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상을 주셔도 소용이 없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 종이 나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창 16:1)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인 여종이 있었습니다.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아이를 갖도록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으니 자기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그러면 그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성경에 흔히 나오는 '사람의 경륜'에 따른 생각과 말이다. 사래도 사람이었기에 지극히 사람다운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을 보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창 17:15) <약속의 아들 이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부터는 사라 라고 하여라.
(창 17:16) 내가 사라에게 복을 주어 너를 위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다. 또 내가 사라에게 복을 줄 것이니, 사라는 여러 나라의 어머니가 되며 여러 나라의 왕들이 사라에게서 나올 것이다.”


(창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사라는 나이가 아흔 살인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창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창 17:1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 이라고 하여라. 내가 네 아들과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네 아들의 자손과 세울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창 17:20) 네가 이스마엘에 대해 한 말은 내가 다 들었다. 이스마엘에게도 내가 복을 주어, 그에게 많은 자손과 후손이 있게 하며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큰 지도자 열두 명의 아버지가 되고,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창 17:21)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이삭과 세운다. 이삭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쯤 낳을 것이다.”
(창 17: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나누신 뒤에 아브라함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될 것이라 하시고(창17:5) 많은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하라고 하시며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내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겠느냐, 사라는 나이가 90살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란다'고 지금 그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실 것이고 그 후손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까지 소상하게 이미 말씀을 해주신 바가 있다. 

 


(창 15:5)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기에 정말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땅의 관점에서,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 당시의 아브람과 사래의 생각과 말과 크게 다르지 않는 자리가 있음을 본다. 

 

사실상 내 생각과 내 말은 하등 필요가 없다. 나는 끽해야 7~80년을 살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키락 한 올도 내 마음대로 검게 하거나 희게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나인데,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사실 내가 정말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고, 무슨 뜻으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그것을 '듣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은즉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해야하는 것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은, 그가 먼저는 땅에 속한 사람의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할례도 행하고, 이후에 이삭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증거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히 6: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히 6:14)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히 6:15) 아브라함은 인내를 가지고 이 약속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히 6:18)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으로 약속하지 않으시며, 거짓 맹세도 하지 않으십니다. 변하지 않는 이 두 사실은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며, 우리가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히 6:19)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내 생각, 내 말을 들이밀지 말자. 내 수준대로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한낱 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더욱 귀를 열고, 마음을 열자! 내 생각과 내 말이 앞서기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것에 더욱 매달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요 15:4)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주워다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아멘! 참으로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품기보다는 나의 옳다하는 소견을 주님께 들이밀며 '이러면 어떡해요, 저러면 어쩌지요' 하는 자리가 결국에는 불신앙의 자리임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회개합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내 말이 앞서지 않도록 제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내 생각으로 이러고 저러고 하는 자리가 없도록 제 생각에도 재갈을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품기 전에 너무나 많은 내 생각으로 온갖 말을 했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성령님이 오셨으니 그 성령님을 더욱 의식하고 더욱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빠르게 하옵소서! 그리해야 내가 살겠나이다! 그리해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겠나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서도 자꾸 외면하고 회피했던 것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은 어느날 갑자기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을 선택하신 것인지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향해 복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창 12: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나라와 네 친척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창 12:2) 내가 너를 큰 나라로 만들어 주고,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창 12:3) 너에게 복을 주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하겠다.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12장과 13장에는 아브람이 가는 곳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아브람은 그 곳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 12:8) 그리고 나서 아브람은 세겜에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갔습니다. 아브람은 그 곳에 장막을 세웠습니다. 서쪽은 벧엘이었고, 동쪽은 아이였습니다. 아브람은 그 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13:4) 그 곳은 아브람이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13:18) 그리하여 아브람은 자기 장막을 옮겼습니다.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큰 나무들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 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서 '기복신앙'이라는 것을 배격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 사람이 이 땅에서 잘 되게 해달라고 빌면 안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소위 기복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와 Give and Take의 거래를 하는 듯한, 그래서 자꾸 사람 편에서 '하나님이 저한테 이거 해주시면 저도 이거 할께요'라는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복'의 행위를 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복을 선포하셨기에 우리는 복을 구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사실은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더욱 깨닫게 되는 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복을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어떤 점을 보시고 그를 고르셨는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으나 분명한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 12: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란을 떠났습니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갈 것에 기꺼이 순종하여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었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가는 곳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제단을 쌓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복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복의 선포와도 같다. 그것은 이미 선포되었으나, 순종하는 자에게서만 성취가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깨닫게 된다. 

 

아직 아브람이 뭘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복을 선포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인간을 향한 사랑이란 참으로 절대적이며, 일방적이고, 또한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요일 4:19, 쉬운성경)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롬 5:8, 쉬운성경)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롬 11:29, 개역개정)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Give and Take의 거래 관계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일방적으로, 절대적으로 사랑하셨고, 그냥 지명하여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 그 부르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만 그 부르심에 응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아브람을 불러 복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절절한 일방적인 사랑도 없다 싶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이후에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서 선포하신 복을 아브람에게 정말로 줄 만하다, 아브람이 정말로 그 복을 받을 만하다고 여기시며, 당신의 선택에 대해 기쁜 마음이 들지 않으셨을까^^

 

아, 오늘의 묵상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내가 사람의 언어로 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정말 엄청나다. 우리가 할 것은 그렇게 먼저!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화답하며, 나 또한 사랑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 뿐인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을 구하고, 문제해결을 위해서의 목적이 아닌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이다. 

 


 

절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복을 보면서 이미 그 복이 내게도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고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았듯이 그렇게 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다른 어떤 이유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자체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마땅한 것인데, 자꾸만 이 땅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가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치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사람인양 생각했던 나의 무지함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야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심으로 이미 태초부터 온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누리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미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은 온 세상 가운데 충만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과 복이 가득함에도 늘 나의 문제를 앞세우며 그것이 당장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힘들어하고 우울해하고 괴로워했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이미 온 땅 가운데 충만히 선포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으로 나아가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참으로 좋으시고 사랑 그 자체이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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